중동·동남아 플랜트·인프라 수주가 이어지면서, 발주처와의 계약분쟁이 국내 소송이 아니라 국제중재로 진행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재지와 준거법은 분쟁이 발생한 뒤가 아니라 계약 체결 시점에 이미 정해져 있고, 이 두 가지 선택이 이후 절차 진행 방식과 증거 채택 기준, 나아가 판정의 승인·집행 가능성까지 좌우합니다.
본 글은 ICC, SIAC, LCIA, KCAB 국제중재규칙 등 상사중재 조항을 전제로 하며, 투자자-국가 간 ICSID 중재는 다루지 않습니다.
중재지(Seat)·심리장소(Venue)·준거법(Governing Law)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계약서에 "분쟁은 싱가포르법에 따라 해결한다"는 한 문장만 두고 넘어가는 경우를 실무에서 종종 봅니다. 그러나 국제중재 조항은 최소한 세 가지 요소를 구분해서 정해야 합니다. 중재지(Seat of Arbitration), 실제 심리가 열리는 장소(Venue/Hearing Venue), 계약의 실체를 판단하는 준거법(Governing Law of the Contract)입니다. 세 가지가 같은 도시·국가를 가리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계약서에 각각을 명확히 특정하지 않으면 절차 초기부터 관할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중재지가 결정하는 것 — 절차의 뼈대(lex arbitri)
중재지는 단순히 서류상 주소가 아니라, 그 중재를 규율하는 절차법(lex arbitri)을 정하는 기준입니다. 중재지의 법원이 중재판정 취소소송의 관할 법원이 되고, 중재판정부 구성·증거조사·보전처분에 대한 법원의 지원 범위도 중재지법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중재지가 뉴욕협약(외국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협약) 체약국인지 여부는 이후 판정을 발주처 소재국이나 제3국에서 강제 집행할 수 있는지와 직결됩니다.
준거법이 결정하는 것 — 계약 해석과 클레임 성립요건
준거법은 계약 문언의 해석, 손해배상 범위, 통지(Notice) 조항 위반의 효과, 시효·제척기간 같은 실체적 쟁점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FIDIC 등 국제 표준계약조건을 사용하더라도 준거법에 따라 동일한 조항의 해석과 효력이 달라질 수 있어, 계약 체결 시 준거법을 특정하지 않으면 공사 수행지국법이 저촉규정에 따라 준거법으로 결정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발주처 소재국의 강행법규(공서양속, 현지 건설관련 규제 등)가 당사자 합의보다 우선 적용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 구분 | 무엇을 좌우하는가 | 계약 체결 시 확인사항 |
|---|---|---|
| 중재지(Seat) | 절차법(lex arbitri), 취소소송 관할, 법원의 보전처분·증거조사 지원 범위, 뉴욕협약 적용 여부 | 중재친화적 법제 여부, 자국 법원의 개입 정도, 판정 집행 실효성 |
| 심리장소(Venue) | 실제 심리기일이 열리는 물리적 장소(비용·이동 편의) | 중재지와 분리 지정 가능 여부, 원격심리 허용 범위 |
| 준거법(Governing Law) | 계약 해석, 클레임 성립요건, 손해배상 범위, 통지조항 효력 | 발주처 소재국 강행법규와의 저촉 여부, 국제사법상 저촉규정 |
| 중재규칙(Rules) | 기관 관리 여부, 신속절차, 병합·다수당사자 절차 | ICC·SIAC·LCIA·KCAB International 등 선택 근거 |
절차 진행과 증거 채택에 미치는 실무적 영향
중재지·준거법의 배경이 되는 법계(대륙법계/영미법계)는 절차 문화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국내 건설사가 익숙한 국내 소송·감정 실무와 달리, 국제중재에서는 문서제출절차(Document Production), 증인신문, 전문가증인 활용 방식이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서제출절차 — Redfern Schedule
영미법계 절차 전통이 강한 중재에서는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특정 카테고리의 문서 제출을 요청하고, 중재판정부가 요청의 타당성·범위를 항목별로 판단하는 방식(이른바 Redfern Schedule)이 실무적으로 널리 쓰입니다. IBA Rules on the Taking of Evidence in International Arbitration은 이러한 문서제출 요청·이의·판정부 결정의 기준을 제시하는 절차 준칙으로, 다수의 중재에서 절차명령을 통해 준용됩니다. 국내 소송의 문서제출명령 실무와 요건·범위가 다르므로, 현장기록·이메일·공정표 등 프로젝트 문서의 보관·버전관리 체계를 중재를 염두에 두고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인·전문가 증언 방식
서면 증인진술서(Witness Statement)를 먼저 제출하고 심리기일에는 반대신문(Cross-Examination) 중심으로 진행되는 방식이 일반적이며, 손해액·지연분석 등 전문 쟁점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지정한 전문가증인(Party-Appointed Expert)의 보고서와 반대신문이 핵심 증거로 다뤄집니다. 국내 법원 감정과 달리 중립적 감정인이 항상 선임되는 것은 아니므로, 자체 전문가증인 보고서의 논리와 근거자료 정합성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언어와 다층 계약구조
중재 절차 언어가 계약 체결 언어와 다르게 지정되면 번역·통역 비용과 시간이 커지고, 원본 문서와 번역본 간 해석 차이가 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EPC 원계약과 하도급·컨소시엄 계약의 분쟁해결조항이 서로 다른 중재기관·중재지를 정하고 있으면, 관련 청구를 하나의 절차로 묶어 판단받기 어려워 절차가 중복되고 판정이 상충할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개정된 대한상사중재원(KCAB) 국제중재규칙(2026년 1월 1일 시행)이 복수계약에 따른 단일중재·병합 절차를 명문화한 것도 이러한 다층 계약구조 분쟁에서의 실무적 필요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약 체결·클레임 대응 단계에서 확인할 사항
중재지·준거법 조항은 분쟁이 불거진 뒤에는 바꾸기 어렵습니다. 계약 체결 단계와 클레임 대응 초기 단계에서 각각 점검할 항목을 구분해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 계약서에 중재지, 심리장소, 준거법, 중재규칙(기관)이 각각 별도 문구로 명확히 특정되어 있는가
- 중재지 소재국이 뉴욕협약 체약국인지, 발주처 자산 소재국에서 판정 집행이 가능한지 확인했는가
- 준거법이 발주처 소재국의 강행법규·공서양속 규정과 저촉될 여지는 없는가
- EPC 원계약과 하도급·컨소시엄 계약의 분쟁해결조항(중재지·중재기관)이 서로 일치하는가
- 현장기록·이메일·공정표 등 프로젝트 문서가 문서제출절차(Document Production) 요청에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보관되고 있는가
- 손해액·지연분석 등 전문 쟁점에 대해 자체 전문가증인 보고서를 준비할 인력·데이터 체계를 갖추고 있는가
계약 체결 단계에서 조항을 이미 확정했더라도, 클레임 발생 초기에 위 항목을 재점검하면 절차 대응 전략을 조기에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구분 | 적용 또는 참고 기준 |
|---|---|
| 국제규범·조약 | 뉴욕협약(외국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유엔협약) 제5조상 승인·집행 거부사유 및 관련 국내 대법원 집행판결례 |
| 국제중재 절차준칙 | IBA Rules on the Taking of Evidence in International Arbitration(2020) 및 Redfern Schedule을 통한 문서제출절차 실무 |
| 국내 중재기관 규정 | 대한상사중재원(KCAB) 국제중재규칙 전면개정(2026.1.1 시행) — 복수계약에 따른 단일중재 등 병합 규정 |
| 학술논문 | FIDIC 조건을 사용하는 국제건설계약의 준거법 결정 방법과 실익에 관한 국내 학술논문 |
기준일: 2026. 8. 31. 위 기준은 본 글의 설명에 참고한 범위를 표시한 것으로, 개별 프로젝트에 적용되는 기준과 그 효력은 계약조건·특별조건 및 준거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법률신문, "대한상사중재원(KCAB) 국제중재규칙 전면 개정(2026.1.1. 시행)의 시사점"
- 국가법령정보센터, 외국중재판정 집행판결(뉴욕협약 제5조 관련) 판례
- 신현식·정수용·최대혁, "국내기업의 FIDIC 이용실태와 유의사항"
- IBA, "IBA Rules on the Taking of Evidence in International Arbit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