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EPC 현장에서 한국 원사업자와 한국 협력사가 체결하는 하도급계약은 실무 편의상 FIDIC 표준계약조건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계약 당사자가 모두 국내 법인이라면, 공사가 해외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정만으로 국내 하도급법의 적용이 당연히 배제되지는 않습니다.
본 글은 국내 법인인 원사업자(EPC 계약자)와 국내 법인인 협력사(서브컨트랙터) 사이에, 해외 현장을 대상으로 FIDIC 표준계약조건을 기초로 체결하는 하도급계약을 전제로 합니다. 수급사업자가 순수 외국법인인 경우의 역외적용 문제는 별도로 검토가 필요합니다.
해외 현장이라는 이유로 하도급법을 비켜갈 수 있는가
하도급법은 국외에서 이루어지는 건설위탁에 대해 명시적인 역외적용 근거 규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실무에서는 "발주자가 해외에 있고 공사도 해외에서 진행되니 국내 하도급법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전제로 FIDIC 조건을 그대로 옮겨와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약 당사자인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모두 국내에 본사를 둔 법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학계에서도 하도급법령의 문언과 공정거래위원회·법원의 태도를 근거로, 국내 법인 간 하도급거래는 이행지가 해외라는 사정만으로 하도급법 적용에서 당연히 벗어난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우회하는 거래 형태, 즉 국내 원사업자가 해외 현지법인을 통해 협력사와 계약을 체결하거나 협력사의 해외법인을 계약당사자로 내세우는 구조에 대해서도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계약 체결 이전에 국내 당사자 사이에 이미 기본계약 관계가 존재하는지, 계약의 형식·조건이 국내 다른 하도급거래와 유사한지, 원사업자 임직원이 이행·관리·감독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지, 국내 거래에서 쓰던 자재·수행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지와 같은 정황을 종합해 실질적 하도급관계를 인정하는 방향입니다. 형식상 계약당사자를 해외법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규제를 피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입니다.
입법 흐름도 이와 같은 방향입니다. 국회에는 국내 원사업자와 국내 수급사업자 간의 국외 건설위탁에도 하도급법을 명시적으로 적용하고, 계열회사인 외국법인이 당사자로 참여하는 거래까지 적용 범위에 포함하는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아직 시행 전이라 해도, 이런 입법 시도 자체가 "해외 현장=하도급법 적용 제외"라는 실무 관행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신호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 준거법 지정의 한계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계약 당사자가 FIDIC 조건에 따라 준거법을 영국법이나 제3국법으로 지정했다 하더라도, 국제사법은 계약의 준거법과 무관하게 그 입법목적상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강행법규가 있다면 이를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도급법이 이러한 국제적 강행법규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갈리지만, 최소한 국내 법인 간 거래에서 준거법 조항만으로 하도급법 적용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전제입니다.
FIDIC 표준조건과 하도급법이 충돌하는 지점
FIDIC 표준계약조건은 발주자·시공자 사이의 국제건설계약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으로, 국내 하도급법이 요구하는 대금지급 시기, 지체상금 산정, 손해배상 상한의 강행규정을 전제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체계를 나란히 놓으면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긴장관계가 나타납니다.
1. 대금지급 시기와 조건
FIDIC 조건은 통상 기성확인서(Interim Payment Certificate) 발행과 발주자로부터의 지급을 거쳐 하도급대금 지급 절차가 진행되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사업자가 발주자로부터 대금을 받은 뒤에야 협력사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설계되면, 하도급법이 정한 목적물 인수일 기준의 지급기한 규정과 충돌할 소지가 있습니다. 하도급법은 원사업자가 발주자로부터 대금을 받았는지와 무관하게, 목적물 인수일부터 정해진 기한 내에 수급사업자에게 대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고, 이를 넘기면 지연이자가 발생합니다. 발주자의 지급 지연 위험을 협력사에게 그대로 전가하는 지급조건은 그 자체로 부당특약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2. 지체상금과 손해배상 상한
FIDIC 조건은 지연손해배상액의 예정(Delay Damages)과 함께, 시공자(원사업자에 해당)의 전체 책임 총액에 상한을 두는 조항을 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상한 설정 자체는 국제건설계약에서 널리 쓰이는 방식이지만, 이를 그대로 하도급계약에 옮겨 협력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지체상금·손해배상 조건을 설계하면 문제가 됩니다. 하도급법과 관련 지침은 수급사업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제한하는 지급조건·지체상금 약정을 부당특약으로 규제하고 있고, 손해배상액의 예정이 과다한 경우 법원이 이를 감액할 수 있다는 법리도 별도로 작동합니다. 즉 FIDIC 조건에서 발주자-원사업자 관계를 규율하던 위험배분 논리를, 원사업자-협력사 관계에 그대로 대입하는 순간 국내법상 무효 또는 감액 리스크가 생길 수 있습니다.
3. 검사·인수 절차와 대금 산정 기준일
FIDIC의 완공·인수(Taking-Over) 절차는 발주자 기준의 시험·인수 개념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어, 하도급법이 대금지급기한 산정의 기준으로 삼는 목적물 수령일(인수일) 개념과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주자 인수와 원사업자·협력사 사이의 기성 확인 시점을 구분하지 않고 계약서를 그대로 옮기면, 지급기한 기산일 자체가 불분명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 쟁점 | FIDIC 표준조건의 일반적 접근 | 하도급법상 요구 사항 |
|---|---|---|
| 대금지급 시기 | 기성확인서 발행 및 발주자 지급을 전제로 한 지급 절차 | 목적물 인수일 기준 법정기한 내 지급, 발주자 지급 여부와 무관 |
| 지체상금·손해배상 | 지연손해배상 예정 및 전체 책임 상한 설정 관행 | 수급사업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지급조건·지체상금 약정 규제 |
| 검사·인수 기준일 | 발주자 기준의 완공·인수 절차 | 목적물 수령일(인수일) 기준 지급기한 산정 |
| 준거법 | 제3국법 또는 영국법 등 지정 관행 | 국내 강행법규는 준거법 지정과 무관하게 적용될 여지 |
계약 체결 단계에서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가
분쟁이 불거진 뒤 FIDIC 조건과 하도급법의 충돌을 다투는 것보다, 계약 체결 단계에서 이를 미리 걸러내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리스크도 작습니다. 실무적으로는 FIDIC 조건을 참고하되, 대금지급·지체상금·손해배상 관련 조항만큼은 국내 하도급법 기준에 맞춰 별도로 수정하는 방식이 안전합니다.
- 계약당사자가 모두 국내 법인인가, 협력사의 해외 현지법인이 형식상 당사자로 끼어 있는 구조는 아닌가
- 대금지급 조항이 발주자로부터의 수령을 지급의 정지조건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Pay-when-paid 유형)
- 협력사에 대한 지급기한이 목적물 인수일을 기준으로 법정기한 이내로 설정되어 있는가
- 지체상금·손해배상 상한 조항이 협력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가
- 손해배상 총액 상한(overall liability cap)이 원사업자·협력사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도록 되어 있는가, 그 적정성을 검토했는가
- 기성 확인·인수 절차와 하도급대금 지급기한의 기산일이 명확히 연결되어 있는가
- 준거법 조항이 국내 강행법규 적용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오인되고 있지 않은가
- 부당특약에 해당할 수 있는 조항(간접비 미지급, 위험비용 일방 전가 등)이 FIDIC 원문 번역 과정에서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위 항목 중 일부가 이미 계약에 반영되어 있지 않더라도, 정산·클레임 단계에서 조항의 효력을 다툴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다만 계약 체결 시점에 점검하는 편이 분쟁 비용과 불확실성을 크게 줄입니다.
실무 편의와 법적 리스크는 별개의 문제다
FIDIC 표준계약조건을 국내 협력사와의 하도급계약에 그대로 준용하는 관행은 계약서 작성의 시간과 비용을 줄여주는 실무적 장점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장점이 하도급법 위반이라는 법적 리스크를 상쇄해 주지는 않습니다. 특히 하도급 규제가 계속 촘촘해지는 흐름 속에서, 해외 현장이라는 사정만으로 국내 강행법규의 적용을 피할 수 있다는 전제는 계약 체결 단계에서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 구분 | 적용 또는 참고 기준 |
|---|---|
| 공정거래위원회 하도급거래공정화지침 | 국외 하도급거래에서 실질적 하도급관계를 인정하는 판단기준(기본계약 존재, 거래조건 유사성, 이행·관리·감독 관여, 수행방식·자재 공급 유사성) |
| 입법동향 | 국내 원사업자·수급사업자 간 국외 건설위탁에 하도급법을 명시 적용하고 역외적용 조항을 신설하려는 하도급법 일부개정법률안(2022년, 2024년 발의) |
| 학술연구 | 해외건설공사에 대한 하도급법 적용가능성과 FIDIC 표준계약조건의 하도급법 위반 가능성을 분석한 국제법무연구 논문 |
| 법령 |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3조(하도급대금의 지급 등) 및 부당특약 관련 규제 |
기준일: 2026. 9. 7. 위 기준은 본 글의 설명에 참고한 범위를 표시한 것으로, 개별 프로젝트에 적용되는 기준과 그 효력은 계약조건·특별조건 및 준거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해외건설공사에 대한 하도급법의 적용가능성 및 FIDIC 표준계약조건의 하도급법 위반가능성", 국제법무연구
- 메트로서울, "국내 기업의 해외 현지법인 통한 '하도급법 회피' 제동"
- 이투데이, "해외 건설 하도급법 '구멍'⋯미정산 떠안는 중소업체"
- 법률신문, "외국기업에 대한 하도급법 적용 개정안 발의"
-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13조(하도급대금의 지급 등)